설겆이를 하고 나니, 배수구의 음식물 거름망이 반쯤 차있는 것이 보였다. 음식물 쓰레기통을 가져와 거름망을 뽑아들고 음식물을 털어냈다. 털어내면서 보니, 거름망 밑부분이 어찌나 더럽던지. 찌든 때가 누렇다 못해 거의 검은 색으로 변해있었다. (사진을 찍어 올리고 싶으나, 비위가 약한 분들을 위해 참는다). 물론 오늘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매번 보면서도 차마 손대기가 싫어 그 상태 그대로 원위치 시킬 뿐이었다. 다행히도 오늘은 더 이상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청소를 하려고 하니, 무엇으로 작업을 해야할지 난감했다. 그릇을 닦는 수세미로 하기엔 안 될 일 같고. 마땅한 도구가 눈에 띠지 않았다. 결국, 그냥 휴지를 물에 적셔 초벌 작업을 하기로 했다. 휴지를 풀어 한 두번 문지르니 의외로 깨끗해졌다. 이리저리 물을 뿌려가며 쓱싹쓱싹 문질러 댔다. 한 번 문지를 때마다 뽀얀 속살을 드러내듯, 깨끗한 본래의 몸통을 보여준다. 닦기 시작한지 채 1분도 되지 않아, 거의 90%정도가 복구되었다. 손도 대기 싫어 며칠인지도 모를 시간을 방치했건만,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쉽게, 깨끗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 짧은 작업 후에 느끼는 개운함은 생각보다 컸다.
그저 1분이면 될 것을. 매번 거름망을 비울 때마다 그것을 쳐다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혹시 손에 뭐가 묻기라도 할까 벌벌했었다. 사실 설겆이할 때마다 음식물을 비워내고, 배워낼 때마다 살짝 닦아주면 찌든 때 같은 것은 생길 틈도 없다. 어렵지 않게 항상 깨끗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찌든 때라는 것도 결국 하루하루의 때가 쌓인 것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우리네 인생도 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삶에서, 자신에 대해서 자세히 들여다 보기 싫은 부분이 있다. 그것을 들여다 볼 기회가 생기면, 그저 외면하고 다른 곳으로 재빨리 눈을 돌린다. 마치 그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당연히 삶에도 찌든 때가 끼기 시작한다. 그것은 점점 더러워져서, 본래의 색을 잃어버린다. 어느 선을 넘으면 그것은 다시 원상복구 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특별히 다른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저 그 상태로 평생을 간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새 운명이 되어 버린다.
다행스러운 것은 개선이 불가능해 보일 뿐이지,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이 말을 습관적으로 자주 한다. 정말 그러한 것인가?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최선의 방법을 찾기 보다는, 그저 그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하지만, 문제해결에는 사실상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방법)을 선택한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은 대표적인 예이다. 무언가 손을 대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아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변화를 시도한다는 것은, 검은 찌든 때가 낀 거름망에 손을 대는 것처럼 선뜻 내키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내 손이 한 번 닿을 때마다 엄청난 양의 찌든 때가 벗겨져 나가는 것을 보는 것처럼, 변화의 과정은 매번 놀라움과 기쁨, 흥분을 안겨줄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을 결코 알 수 없다. 그저 영원토록 그 찌든 때를 바라보며, 사는 수밖에...
거름망에 찌든때가 낀 것을 볼 때마다 내가 한 짓은 베이킹소다를 이러저리 뿌려 다시 배수구에 꼽아 넣는 것이었다. 그저 깨끗하게 닦아내면 될 것을 그것을 하지 못해, 아니 하기 싫어, 단지 손 안대고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을 택한 것이다. 손 안대고 코를 풀려 했었다.(코풀기의 고수라면 가능할지도) 베이킹소다를 단지 뿌려놓는다고 째든때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결국 손을 대지 않고는 처리할 수 없는 문제였다. 단 1분도 걸리지 않는 일을 하지 않아, 매번 설겆이를 하고도 찝찝한 마음으로 마무리를 해왔던 것이다. 지금 당신의 마음 속에 찝찝함을 남기고 있는, 그 찌든 때는 무엇인가??
직업이나 직장을 바꾸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꽤나 큰 일에 속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더러 있더군요. 저 역시도 직장 또는 직업을 바꾼 전적이 몇 건 있습니다. 한 직장에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에 비하자면, 전적이 꽤나 화려한 사람이죠. 그렇게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마다 마음 속에는 품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제 과거와는 다른 삶을 살겠다."
"과거의 나는 지금부터 모두 지워버리는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사람이 갖기에 별로 이상할 것 없는 지극히 정상적인(?) 생각입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지난 날의 나를 설명했던 모든 것-과거의 습관, 좋아했던 것들, 자주 만나던 사람들 등-으로부터 나를 멀리 떨어뜨리려 애썼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과거와의 단절에 대한 그러한 강박관념이 오히려 완전한 새로움을 방해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과거의 나로부터 떨어져나가려 한들 그러한 일은 일어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이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토록 떨쳐내려 애썼던 과거의 모든 경험들은 지금의 나를 만든 훌륭한 밑재료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는 훌륭한 재료들이지요.
진정한 변화는 과거와의 단절 혹은 분리가 아닌, 그것을 포용하고 한 단계 올라서는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입니다. 과거의 자신을 발판으로 삼아 그것을 딛고 올라서 더 높은 곳에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 자신의 지난 인생을 잘 돌이켜 본다면 의외로 건질 것이 많을 것입니다. 자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자신 혹은 타인의 모습속에서도 건질 것이 많을 것입니다. 발 디딜 것이 없는 도약은 이루어내기 힘듭니다.
변화란 어떤 이들에겐 전쟁이다. 이를 악물고 굳은 각오를 하고 시작한다. 지금까지의 나약하고 어리석은, 꼴보기 싫은 자신을 때려 눕히기 위해 성대한 결전의 의식을 치른다. 그 전쟁이 시작되면 역시 적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왠지 불안해 지기 시작한다. 이번에 또 지면 안되는데, 변화하고자 하는 새로운 도전자는 자꾸만 뒤로 밀린다. 이번 만큼은 꼭 이기고 싶었건만, 이길 것이라 확신했건만 또 패배를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아쉽지만 또 다음 기회를 기약하는 수 밖에. 그리고는 다시 행복하지 않은 삶 속에서 소주잔으로 자신을 달래며 주저앉는다.
변화는 전쟁이 아니다. 내가 그것을 전쟁이라 생각하고 덤벼드는 순간, 이미 패배는 결정된다. 결코 이길 수 없는 게임을 시작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변화가 그토록 어려운 이유이다. 물론 이러한 전쟁에서 승리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 역시 훗날 자신이 했던 그것이 결코 전쟁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매일같이 이길 수 없는 게임을 시작하고, 그 패배의 원인을 자신의 못남, 자신의 하찮음으로 돌린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하는 게임을 하면 할수록 더 행복해지기는 커녕, 더 못나고 하찮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하는가? 이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은 정말 있기는 한 것인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나는 정말 내가 생각하는 것 만큼 멋진 인생을 살 만한 인간이 못되는 것인가? 잘못된 질문을 던지면, 잘못된 답을 얻을 수 밖에 없다. "어떻게 하면 저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그것은 제대로 된 질문이 아니다. 우리는 꼭 싸워야 하는가? 우리는 왜 싸우는가? 이 싸움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적어도 이런 질문이 지금까지 우리를 전쟁터로 몰고 갔던 그 질문보다는 더 나을 것이다.
어제 오후, 천직찾기 코칭에 참여하고 있는 고객 분께 전화가 왔다. 저녁 때 그분과 코칭약속이 잡혀있던 터라 발신자만 확인하고서도 그 분이 어떤 일로 전화를 했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 코칭 당일 날 고객분께서 내게 전화를 하는 경우는 거의 대부분 급한 일이 생겨 약속을 연기하거나 취소해야겠다는 내용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예상했던 대로 내가 들은 소리는 "코치님, 죄송해요"라는 말이었다. 그것도 아주 다급한 목소리로.
나는 그분이 죄송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무슨 일인지 물었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의외의 대답을 들었다. 오늘 갑작스레 회사에서 회식 일정이 잡혔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예상했던 대로) 그런데, 코칭엔 절대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분의 부서장님께서 이번엔 절대 빠지면 안되니 무슨 일이 있어도 참석해야 한다고 엄포를 놓았다는 것이다. 자초지정을 솔직히 모두 말씀드렸지만 이번만은 너무 강경하게 나와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이었다. 내게 전화를 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상사분을 설득할 만한 효과적인 방법을 나와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회식자리에 빠질 수 있는 기가 막힌 비책이 없는지 물었다.
나의 스케줄이 너무나 빡빡해서, 오늘 아니면 도저히 할 수가 없다.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이미 장소예약까지 완료된 상태라 바꾸면 손해가 크다.
내가 이미 코칭장소에서 도착해서 준비를 하며 기다리고 있다.
이런 몇 가지 아이디어를 내고 통화를 마쳤다. 그분은 통화를 마치면서도 오늘 꼭 가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전화 받을 때는 첨 경험하는 상황이라 그저 재밌다는 생각이 들어 정신없이 이야기를 했는데, 전화를 끊고나서는 그 분과 인간의 변화라는 것에 대해 또 다른 인식을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 분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상사에게 찍힐 것을 걱정하지 않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이 짧은 시간이었지만 강한 감동을 느끼게 해주었다. 직장에서의 갑작스런 회식, 아무도 빠질 수 없다는 상사의 압박, 이것은 자신과의 약속을 한 번 정도는 그냥 넘겨버리기에 충분한 핑계거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다 인정받을 수 있는 그 핑계거리에 결코 자신만은 타협하지 않는 그 깐깐함. 그 분의 그 깐깐함이 그 분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이제 중반에 달한 그 분과의 코칭이 어떤 모습으로 마무리 될지 어느 정도 눈앞에 그려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를 변화하지 못하게 하는, 더 행복하게 사는 것을 방해하는 괜찮은 핑계거리들은 수도 없이 널려있다. 나는 의지가 약해서, 나는 능력이 없어서 부터 시작해 여건이 안되서, 시간이 안되서, 돈이 없어서 등등. 우리는 너무나 쉽게, 혹은 습관적으로 그러한 것들에 우리의 행복을 내어주는 일을 범한다. 사실 조금만 깊이 이야기를 나눠봐도 그러한 완벽한 핑계들이 정말 그저 핑계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도 말이다. 뭐든지 처음만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할 만하다. 이것은 내게 좋은 것도 그렇고 나쁜 것도 그렇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도 처음엔 어렵다. 그 다음부터는 쉽다. 자신과의 약속을 깨는 것도 처음엔 어렵다. 그 다음부터는 쉽다. 그런데 우리는 후자가 쉽다는 것만을 기억하고, 전자도 쉽다는 것은 항상 잊고 산다.
나는 주변에서 독한 놈이라는 소리를 꽤 많이 듣는다. 이유인 즉슨 이런 것 때문이다. 올 5월부터인가 아침에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지방에 있어서 어쩔 수 없었던 적 한 번을 제외하고는). 지각도 하지 않았다. 내 삶에서는 이런 패턴이 꽤 많이 일어난다. 담배도 어느날 갑자기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끊었다. 지금 세어보니 벌써 8년이 지났다. 이런 나를 두고 주변 사람들은 독하다고 말한다. 때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비법을 묻는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난 의지력이 그리 강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독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살 수 있는 이유는 앞서 말한 것을 항상 명심하기 때문이다. 처음만 어렵지 다음은 쉽다. 뭐든 한 번 해보게 되면, 그 다음 하기는 쉬워진다. 결석도 마찬가지, 지각도 마찬가지이다. 나 역시 그 작은 깐깐함이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잊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이다. 처음만 어렵지 다음은 쉽다는 이 간단한 원리를 당신은 어디에 써먹을 것인가?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의 하나는 "코칭이 무엇이죠?"이다. 코칭으로 밥을 먹고 사는 코치이면서도, 나는 아직도 이 질문에 대답하기가 어렵다. 내가 정말 코칭을 알고 있는 것일까하는 의심은 항상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코칭이라는 말은 너무나 많은 사람에 의해 각기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물론 그것이 언어의 속성이기도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으로서 코칭의 본질이 왜곡되어 사용되는 것은 반가운 일은 아니다. 코칭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사람마다 각기 다른 것으로 인식하면서 코칭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 본질을 알리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항상 하게 된다. 앞서 올린 세 편의 코칭컬럼이 그러한 역할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물론 나 역시도 항상 코칭의 본질을 왜곡하여 전하지 않기 위해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이 글에서 나눈 이야기 대부분은 서점가에 코칭이란 타이틀을 쓰고 있는 책들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내용이다. 그만큼 코칭의 깊은 본질을 정확히 전달하고 있는 책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코칭은 인간의 근본적인 변화와 성장을 돕는다. 이는 곧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깊은 이해와 탐구를 전제해야 함을 뜻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코칭을 자기계발의 새로운 버젼, 혹은 대화스킬, 커뮤니케이션 도구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이것은 아이폰과 같은 스마트폰을 가지고 단지 전화거는 용도로만 쓰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의 본질과 가치를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마치 코칭의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 이들도 많다. 심지어는 코치라는 사람들조차도 그런 경우를 많이 봐왔다. 내가 코치이기 때문에, 코칭의 탁월함과 가치를 강조하고 싶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태도, 인간의 변화와 성장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 말하고 싶을 뿐이다. 변화의 속도가 광속에 가까워지고 있는 현대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길 원한다. 더 성장하길 원하고, 더 변화하길 원한다. 물론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그러한 경우도 많다. 하지만, 변화하고 성장하길 원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변화의 전문가, 자기계발의 전문가임을 주장하며 이러한 이들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혼란과 어려움 속에 몰아넣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의도는 좋았으나, 구조와 원리를 알지 못한 채 접근하여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말이다. 과거 세균에 대한 개념이 없던 시절 의사들이 시체를 해부한 손으로 산파역할을 해 수많은 산모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게 한 것처럼 말이다. 오로지 변화를 위해서는 개인이 노력과 의지가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짓이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국 양자 모두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첫째, 인간은 누구나 무한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둘째, 모든 문제의 해답은 문제를 가진 그 사람의 내부에 있다.
셋째, 탁월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파트너가 필요하다.
코칭은 이 세 가지의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모든 것은 이것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전제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없이는 결코 코칭이 이루어질리 없다. 그리고 이 세가지 전제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깊이 안다면, 코칭이 단순한 도구 그 이상의 것이라는 것을 알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변화에 대해 말합니다. 변화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 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작은 변화도 이루지 못해 힘들어하며 좌절하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수많은 자기계발 서적에서, 그리고 전문가들이 변화의 방법들을 알려주고 있지만 어느 것 하나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 역시도 코치의 길을 걷기로 결정을 한 후, '과연 인간의 근본적인 변화란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코칭은 3가지의 기본 철학를 기반으로 탄생되었습니다. 코칭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은 이 3가지 기본전제를 바탕으로 합니다. 그 중 첫번째는 바로 인간은 누구나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코치가 되기로 마음을 먹고, 꽤 긴 시간의 코치훈련과정을 거친 이후에도 이 전제에 대해 다른 이들에게 자신있게 말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렇다는 믿음만 갖고 있을 뿐 그 가능성과 잠재력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뚜렷하게 잡히질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생각지도 않았던 단어 하나가 그것을 아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코치가 되어 걷는 길에서 시작부터 만나게 된 커다란 벽을 하나 허무는 느낌이었습니다. 고맙게도 그 큰 벽을 허물어 준 단어는 바로 "에너지"였습니다. 에너지. 꽤 오랜 시간동안 과학과는 담을 쌓고 살았던 저에게 이 단어는 분명 낯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 하나로 인간의 변화에 대해 품었던 꽤 많은 궁금증들을 풀어 낼 수 있었습니다.
과학에는 무슨무슨 법칙이라 불리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법칙이라고 할 수 있는 한 가지가 바로 '에너지 보존 법칙'입니다. 에너지 보존 법칙은 바로 열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제기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열이 에너지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과학자들조차도 열을 에너지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열을 그저 하나의 화학작용으로 생각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마이머, 헬름홀츠, 줄과 같은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열이 에너지의 한 형태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열을 포함해 에너지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고 그것들은 다른 종류로 변환될 수 있지만, 모든 에너지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에너지 보존 법칙의 내용입니다. 이후 1905년 아인슈타인은 E=mc^2이라는 유명한 공식을 발표합니다. 질량은 에너지로, 에너지는 질량으로 상호 변환될 수 있다는 것을 밝혀낸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 '에너지 보존 법칙'은 '에너지 질량 보존 법칙'이라고도 불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위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변화'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변화의 근본은 결국 에너지의 변환으로 설명됩니다. 그렇다면, 이는 우리가 말하는 인간의 변화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입니다. 인간은 결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거나 그것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에너지의 변환이라는 관점에서 본 변화와 인간의 변화 역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코칭의 첫번째 철학에서 언급한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이란 것이 과연 무엇인지도 이를 바탕으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전제는 단지 코칭 뿐만 아니라 자기계발을 업으로 삼고 있는 모든 이들이 갖고 있는 기본 전제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잠재력, 가능성, 또한 변화의 본질을 가장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 바로 "에너지"입니다.
현재 국내에서 코칭이라고 하면 대부분 대화모델을 기반으로 한 방식의 코칭을 말합니다. 질문과 경청을 기반으로 한 대화위주의 코칭에서도 코치와 고객 간에는 에너지 교류가 이루어지며, 에너지의 개념을 몸으로 알고 있는 코치라면 반드시 이를 염두해 둘 것입니다. 하지만, 고객의 잠재력 개발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분명 많은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일부 코치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에너지 차원에서 접근하는 에너지 기반의 코칭은 물론이고, 이를 넘어 의식기반의 코칭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돕는 방법을 찾던 중, 에너지와 의식 기반의 코칭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SK(Specialized Kinesiology)는 기존의 아날로그 방식의 접근을 보완하여, 인간을 디지털 정보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서 이러한 시도에 날개를 달아주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더 낫다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변화는 여러 차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으며, 그 차원에 맞는 방법들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단지 코치 뿐만 아니라, 자기계발을 하는 대중들 역시 자신의 변화에 대해 이런 폭넓은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각 중에서도 변화의 근본을 에너지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필수적이라 생각합니다. 수많은 변화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매번 실패를 반복하는 이유, 성공한 사람들조차도 몰랐던 그들의 성공의 비밀 등 많은 의문을 풀어줄 실마리들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계발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 싶어졌다. 자기계발이라는 말은 그 범위가 너무 넓다. 독서를 하거나, 영어공부를 하는 것, 또는 다이어트를 해 살을 빼는 것도 모두 일종의 자기계발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자기계발이라는 것의 범위를 '변화와 성장'이라는 키워드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현재의 자기계발 분야에서 이 키워드와 가장 긴밀하게 연관된 영역이라고 한다면 '자기경영' 또는 '셀프리더십'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럼 일단 이 영역의 현실을 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왜 자기계발을 하는가? 당연히 지금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즉, 변화하고 싶고 더 성장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구의 밑바탕에서는 자신 안에 아직 사용하지 않고 남아있는 잠재력에 대한 인정이 자리잡고 있다. 자신에게 더 나은 삶을 살수 있는 잠재력 혹은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을테니 말이다. 그리고 책을 쓰는 사람이건, 강의를 하는 사람이건 자기계발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인간은 누구나 무한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것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자기계발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인가? 주변에 보면 자기계발 서적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싫어하는 것이다. 그들의 상당수가 하는 말은 대부분이 뻔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책의 저자들이 말하는 대로 해봤자 성공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계발의 무용론을 주장한다. 그들의 말이 모두 맞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저 단순한 편견으로만 치부할 수도 없다. 그들의 말처럼 대부분 자기계발 서적은 뻔한 내용이다. 그 뻔한 내용이라는 것은 아마도 이런 것들일 것이다. "죽도록 노력해라. 그럼 성공할 것이다.", "정말 간절히 원해라. 그럼 성공할 것이다.", "절대 포기하지 말아라. 그럼 성공할 것이다." 수많은 자기계발 서적의 핵심주제를 한 문장으로 한다면 상당히 많은 책들이 이에 속할 것이다. 성공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성공하는 것은 당연하다. 될 때까지 노력하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 말을 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책을 쓰고 강의를 한다. 또, 수많은 사람들이 그 뻔한 말을 듣기 위해 책을 읽고 강의를 듣는다. 하지만, 이런 식의 주장은 단지 "당신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쓰는 방법을 알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그냥 노력하다보면 언젠가는 나올 것이다. 내가 그 증거다"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자기계발 무용론자들의 주장처럼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한다고 성공하기 힘들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시키는대로 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들은 그들만의 방법이고 단지 하나의 모델 혹은 사례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 방법대로 해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이 쉽게 따라할 수 없는 방법을 제시하며 그대로 하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는 아주 단순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자기계발 책을 읽고, 혹은 강의를 듣고 난 후에 실제 삶에서 변화와 성장을 이룬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를 보면 된다. 성공의 법칙을 전해 듣고서, 실제 성공한 사람들이 몇 명인가를 보면 된다. 한 마디로 성과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대부분의 자기계발 전문가들은 대중이 보기에 혹할 만한 프로필을 가지고 있다. 박사학위, 유학파, 각종 자기계발 프로그램 수료증, 강사 자격증, 무슨 협회 회원 등 화려한 수식어로 치장이 되어있다. 그리고 국내 수많은 기업에서의 강의경력 등이 옵션으로 따라 붙는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그들이 어떠한 성과를 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몇 권의 책을 내고, 몇 군데에서 강의를 했다는 것을 가지고 성과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들의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난 후 삶에서 근본적인 변화와 성장을 이루어낸 사람들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상하지 않는가? 전문가가 내세울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성과"뿐이다. 그런데, 그것을 볼 수 없는 전문가가 너무나 많다.
어떤 전문가는 오로지 자신의 성공 스토리만을 내세운다. 국내 한 전문가의 강연을 두 번 들은 적이 있었다. 두 번의 강연주제는 모두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강연자는 두 번의 강연에서 모두 같은 내용의 강의를 했다. 그 내용은 자신의 성공 스토리였으며, 정작 두 개의 강연주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내용이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자신은 본인의 성공스토리 뿐만 아니라, 박사학위까지 받을 만큼 학문적인 배경이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문에 훨씬 경쟁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건, 학문적 배경을 바탕으로 했건 그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단지 중요한 것은 바로 자기계발의 전제인 인간이 가진 무한한 잠재력의 계발, 그것을 이뤄낼 수 있냐 없느냐일 뿐이다. 바로 그 사람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진짜 변화를 이루었는가일 뿐이다. 많은 대중이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도 변화하지 않는다. 수 백권의 책을 읽고도, 수 백만원 어치의 강의를 듣고도 감을 잡지 못해 헤매고 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그리고 전문가들은 변화에 실패한 그들에게 말한다. "죽도록 해야된다니까요. 내 말 안들으니깐 실패하지.". 혹은 "이번에 Basic코스를 마쳤으니, Advanced를 들으면 성공할 수 있을 겁니다." 이에 대중은 나약한 자신의 모습에 또다시 실망하며 좌절한다. 결국 그들은 자신안에 잠재력 같은 것은 있지 않다는 확신을 더 강하게 갖게 될 뿐이다. 성공하기 위해 했던 자기계발이 오히려 성공으로부터 영영 멀어지게 만드는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이런 일들은 대부분 인간의 잠재력에 대한 부적절한 접근방식으로 기인한 것이라고 본다. 기본 전제가 있다면, 모든 것은 그 기본 전제를 거스르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자기계발의 기본 전제가 "모든 인간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라고 한다면, 자기계발의 모든 방법과 과정 역시 그를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변화와 성장을 이루는 데 있어서, 그 주체는 누구이어야 할까? 소위 전문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일까? 그렇지 않다. 그 주체는 철저히 당사자 본인이어야 한다. 쉽게 말해 전문가라는 사람이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그런 방법이 통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그 사람이 변화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갖춰졌을 때, 때마침 그를 만났기 때문일 뿐이다. 자식이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변화시킬 수 있는 부모가 몇이나 될 것이며, 아내 혹은 남편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다른 누군가가 한 사람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변화시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럼 누군가를 변화시키기 위해 전문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경험대로 하라고 시키거나, 성과에 대해 확신할 수도 없는 이론을 들이대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해야 할 일은 오로지 그 사람 스스로가 변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돕는 것 뿐이다. 그 사람은 이미 스스로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을 테니 말이다. 동서고금을 막록하고 의학에서는 약을 쓰는 약의藥醫보다는, 음식으로 병을 고치는 식의食醫를 높이 평가하며, 그보다는 마음을 다스려 병을 고치는 심의心醫를 높게 평가한다. 즉, 환자에게 처방을 하기 보다는, 마음을 다스려 본래 건강한 몸으로 태어난 그 상태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의술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자기계발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인간은 누구나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다. 변화와 성장은 자연과 우주의 근본적인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인간이라고 해서 가지고 있지 않을리 없다.
기존의 자기계발이 보는 또 하나의 한계는 바로 "문제"를 인식하는 방식이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는 것이 바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수많은 문제들을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변화와 성장에 있어서도, 인간의 관심사는 대부분 자신들이 떠안고 살아가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돈이 없으니 돈을 더 버는 방법을 찾고, 회사에서 인정받지 못하니 더 잘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외모가 불만스러우니 더 예뻐질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인생이란 것이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문제 몇 개 해결한다고 해서, 행복해지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살다보면 언제 어느 순간에 또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문제의 종류와 크기에 따라서 그에 맞는 전문가를 찾아가야 하는 것인가? 우리는 한 번쯤 이런 의심을 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정말 문제인 것이 맞는가?". 헷갈릴지 모르겠다. 쉽게 말해, 당신이 줄곧 문제라고 생각해왔던 것이 사실은 문제가 아닐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문제를 문제로만 본다면, 인간은 평생토록 문제를 해결하는데 온 인생을 바쳐야 할 것이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순간은 그저 다음 번 문제가 발생하기 전까의 기간일 뿐이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처럼 말이다. 우리는 의심하고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신이 지금껏 진실이라고 철썩같이 믿어왔던 것들이 진실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라고 믿었던 때는, 단지 지구가 둥글지 않고 평평했다고 믿던 사람들이 살았던 때뿐 만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지금 갖고 있는 문제가 사실 문제가 아니라면 당신은 어떻겠는가?
아주 명쾌합니다. 다른 결과를 원한다면, 다른 방식으로 하면 됩니다. 건강해지길 원한다면 지금까지 해 온 생활패턴을 바꾸거나, 주로 먹는 음식을 바꾸면 됩니다. 돈을 많이 벌길 원한다면,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일을 하거나,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으로 바꾸면 됩니다. 인간관계로 힘들다면,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지금의 인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저 불평만 늘어놓으실 건가요? 지금의 인생도 여러분이 만들어 낸 결과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방식으로 지금의 인생을 만들어 내셨나요? 지금의 인생과는 다른 인생을 만들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하셨나요?
인류학자(Anthropologist)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은 일본 문화의 틀을 깊이 있게 연구한 것으로 유명한 문화인류학 분야의 명저이다. 이 책이 특이한 점은 1944년 미국 국무성의 위촉으로 연구를 시작한 저자가 단 한 번도 일본을 방문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일본을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사람이 일본 문화를 연구하여 세계적인 명저를 내놓았다는 것이 언뜻 이해가 되진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점은 학문의 연구에서 그 대상을 직접 목격하지 않은 쪽이 오히려 더 엄밀하고 객관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체로 부분적인 체험은 전체를 보기보다는 오히려 전체적인 관찰을 방해하기 쉬운 것이다.
또한 일본에 관해 일본인이 연구하거나, 한국에 관해 한국인이 연구하는 것은 자칫하면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간과한 채 넘기기가 쉽기도 하다. 마치 우리가 항상 호흡하는데 사용하는 공기의 존재를 늘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안경의 경우 안경을 쓴 당사자가 렌즈의 처방을 알고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국민이 자기의 세계관을 분석하는 데 기대를 걸 수가 없다....(중략)...우리는 사회과학자의 직업이야말로 의심할 바 없이 현대 세계의 여러 나라 국민에 관해 이 안과 의사와 같은 역할을 하리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보니 루스 베네딕트가 책을 쓰기 위해 일본을 연구한 방식이나, 문화인류학에 대한 그녀의 정의가 코칭과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코치는 고객의 과거나 사생활을 깊이 탐구하지 않는다. 마치 자신이 고객의 모든 체험을 다시 경험해보려는 것처럼 과거사를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다. 현재의 생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라이프 코칭의 경우 고객의 전반적인 삶의 영역을 두로 다루는 것이 원칙이기도 하지만, 이는 앞으로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 미래지향적인 것이다. 코치가 고객의 마음속에 들어가 고객의 모든 것을 느끼고 체험하기 보다는 한 발짝 떨어져 고객이 스스로 코치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루스 베네딕트가 일본을 방문한 적 없이 철저하게 일본 밖에서 일본을 연구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녀 역시 책을 통해 일본의 모습을 마치 거울과 같이 비춰줄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로 문화인류학자를 안과의사로 비유한 것은 코치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코칭의 기본 전제는 고객이 모든 문제의 해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객은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을 찾아내는 데 익숙하지 않다. 안경을 쓰고는 있지만, 자신이 쓰고 있는 렌즈의 처방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코치라는 상호책임의 파트너가 필요하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처방은 코칭의 과정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코칭에서는 처방하지 않는다. 코칭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고객이 탁월한 셀프코치가 되는 것이다. 코치가 없어도 스스로 자신의 훌륭한 코치가 되기를 바란다. 즉, 코칭고객은 안경을 쓴 안과의사가 되는 것이다.
세 번째로 문화인류학은 연구하는 민족에게서 나타나는 어떠한 독립된 행동도 서로 체계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코칭은 주로 판단없는 경청과 강력한 질문을 통해 진행된다. 특히 코칭에서 경청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뿐더러, 경청은 모든 다른 기술들의 전제조건이 되기도 한다. 그러한 깊은 경청 중에 코치는 고객의 말은 물론이고, 그 이상의 것들을 듣게 된다. 말하는 순간의 감정이나 표정, 제스처, 가능하다면 에너지의 흐름까지 모든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경청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그 순간 어느 하나도 무의미한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서로 관계를 가지고 고객을 드러낸다. 단지 코칭세션 중의 경청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코칭과정 중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수집되는 모든 정보는 그 어느 것 하나 가볍게 여겨질 수 없다. 고객이 무심코 내뱉은 한 마디가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식의 접근 방식은 코칭을 결국 통합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코칭 초기에 고객이 밝힌 코칭이슈는 물론이며, 고객의 삶의 다양한 분야를 통합적으로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 인간의 삶이란 것이 어느 하나만으로 그 만족도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코칭은 개인을 대상으로 한다. 문화인류학은 개인이 모여 이룬 조직, 공동체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이다. 개인과 공동체, 그 대상은 다르지만 근본은 역시 인간이다. 그런 면에서 코칭과 문화인류학이 많은 공통점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코칭과의 연관성을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책 속에서 코칭과의 연결고리를 찾아낸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인간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한 또 다른 좋은 소스를 찾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