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의 하나는 "코칭이 무엇이죠?"이다. 코칭으로 밥을 먹고 사는 코치이면서도, 나는 아직도 이 질문에 대답하기가 어렵다. 내가 정말 코칭을 알고 있는 것일까하는 의심은 항상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코칭이라는 말은 너무나 많은 사람에 의해 각기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물론 그것이 언어의 속성이기도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으로서 코칭의 본질이 왜곡되어 사용되는 것은 반가운 일은 아니다. 코칭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사람마다 각기 다른 것으로 인식하면서 코칭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 본질을 알리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항상 하게 된다. 앞서 올린 세 편의 코칭컬럼이 그러한 역할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물론 나 역시도 항상 코칭의 본질을 왜곡하여 전하지 않기 위해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이 글에서 나눈 이야기 대부분은 서점가에 코칭이란 타이틀을 쓰고 있는 책들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내용이다. 그만큼 코칭의 깊은 본질을 정확히 전달하고 있는 책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코칭은 인간의 근본적인 변화와 성장을 돕는다. 이는 곧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깊은 이해와 탐구를 전제해야 함을 뜻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코칭을 자기계발의 새로운 버젼, 혹은 대화스킬, 커뮤니케이션 도구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이것은 아이폰과 같은 스마트폰을 가지고 단지 전화거는 용도로만 쓰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의 본질과 가치를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마치 코칭의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 이들도 많다. 심지어는 코치라는 사람들조차도 그런 경우를 많이 봐왔다. 내가 코치이기 때문에, 코칭의 탁월함과 가치를 강조하고 싶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태도, 인간의 변화와 성장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 말하고 싶을 뿐이다. 변화의 속도가 광속에 가까워지고 있는 현대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길 원한다. 더 성장하길 원하고, 더 변화하길 원한다. 물론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그러한 경우도 많다. 하지만, 변화하고 성장하길 원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변화의 전문가, 자기계발의 전문가임을 주장하며 이러한 이들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혼란과 어려움 속에 몰아넣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의도는 좋았으나, 구조와 원리를 알지 못한 채 접근하여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말이다. 과거 세균에 대한 개념이 없던 시절 의사들이 시체를 해부한 손으로 산파역할을 해 수많은 산모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게 한 것처럼 말이다. 오로지 변화를 위해서는 개인이 노력과 의지가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짓이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국 양자 모두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첫째, 인간은 누구나 무한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둘째, 모든 문제의 해답은 문제를 가진 그 사람의 내부에 있다.
셋째, 탁월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파트너가 필요하다.
코칭은 이 세 가지의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모든 것은 이것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전제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없이는 결코 코칭이 이루어질리 없다. 그리고 이 세가지 전제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깊이 안다면, 코칭이 단순한 도구 그 이상의 것이라는 것을 알수 있을 것이다.
앞서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구조에 대해 설명했다. 그렇다면 그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각기 다른 차원에 살도록 만드는 것일까? 모두가 꼭대기 층에서 최대한 멀리, 최대한 넓은 세상을 보며, 최대한의 가능성을 누리며 살면 좋을텐데 말이다. 사람들에게 이러한 구조에 대해서 말하면 곧바로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위로 올라갈 수 있는데요?"라고 묻는다. 물론 그것에 대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이것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은 탐구가 필요하다. 그것의 진짜 의미를 탐구해나가는 과정 그 자체가 앞서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 될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얻는 답들은 우리가 그토록 찾길 원하던 인간의 변화와 성장의 원리가 될 것이다.
먼저 앞서 말했던 구조(참고), 즉 수직적 구조가 왜 생기는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더 높은 차원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자와, 낮은 층에서 세상의 극히 일부 만을 보며 사는 자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 근본적인 이유를 '경계'라는 단어로 표현하고자 한다. 그 의미만 통한다면 어떤 표현을 써도 상관없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서는 아무런 경계를 갖지 않은 상태이다. 우리는 자라면서 경계를 만들고 그것을 지니게 된다. 경계는 곧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분한다. 물리적으로는 일단 내 몸과 내 몸이 아닌 것 사이에 경계가 만들어진다. 나와 내가 아닌 것 사이에 경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 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 혹은 정신 속에도 경계는 계속해서 만들어 진다. 용기있는 자와 용기없고 비겁한 자를 나누는 경계, 똑똑한 자와 멍청자를 나눈 경계, 잘생긴 자와 못생긴 자를 나누는 경계, 친절한 자와 불친절한 자를 나누는 경계 등 수 많은 경계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대체로 우리는 그 경계를 기준으로 어느 한 쪽을 나의 입장으로 선택하게 된다. 가족에 대해서, 연인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돈에 대해서, 세상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는 경계를 만들어 간다. 그것이 곧 세상에 적응해나가는 과정이다. 마치 세포가 끊임없이 분열하여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내듯이, 우리 인간 역시 끊임없이 경계를 만들어가며 분열하고 성장해간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경계의 양쪽을 통합하지 못하고, 둘 중 하나에 우리를 가둠으로써 일어난다.
바꿀 수 없는 운명을 바꿀 수 있는가?
빈 백지 한장을 준비해보라. 그리고 그것을 반으로 접고, 또 반으로 접고, 이를 반복하는 것이다. 몇 번 접다보면 어느새 종이가 두꺼워져 더 이상 접을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우리가 경계를 만들어 그 안에 우리를 가두는 것은 그러한 모습과 같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우리가 보는 세상과도 같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우리가 우리를 경계에 가둔만큼 제한되어 있다. 그것이 내가 보는 세상의 영역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더 넓은 가능성을 보며 더 확장된 삶을 사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접었던 종이를 펴는 것처럼, 내가 가두었던 경계를 허물고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수직적 위치를 결정짓는 요소이다. 자신이 볼 수 있는 세상의 넓이는 자신이 갇혀있는 경계에 의해 결정된다. 그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그것을 결정하겠는가? 그리고 그 경계를 벗어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한편으로는 운명적이기고 하고, 전혀 그렇지 않기도 하다. 자신의 경계 속에서 살고자 하는 이를 누구도 어찌할 수 없다. 그것은 그가 '선택한 운명'과도 같다. '선택한 운명'이라는 아이러니한 표현에 주목하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변화에 실패하는 이유는 이러한 경계를 놓아버리지 않으려고 함에 있다. 그것을 기준으로 자신과 자신이 아닌 것을 나누고,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굳게 지키려 한다. 경계는 곧 관점을 만들고, 이는 곧 입장을 만든다. 경계를 기준으로 생긴 관점, 입장을 놓아버리고, 과감히 그 둘을 통합하는 단계로 나아가길 선택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변화의 핵심 원리이다. 이는 삶에서 우리가 보는 가능성을 결정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우리가 우리 사용할 수 있는 우리의 잠재력을 결정한다. 그것은 곧 우리 삶의 핵심적인 모든 요소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원리에 대해 말하는 이도 많고, 그들 나름대로 사용하는 표현, 설명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그래서 때로는 어떤 것은 옳고, 어떤 것은 틀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 그것들은 어떤 면에서는 전적으로 맞고, 어떤 면에서는 전적으로 틀리다. 그 이유도 하나이다. 바로 앞서 말한 수직적 구조 때문이다. 수직적 구조에서 상승하는 과정을 하나의 여정이라 한다면, 그 여정에서 필요한 방법이나 도구는 모두 다를 것이다. 그리고 그 원리를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일 수 밖에 없다. 핵심원리는 하나일지 몰라도, 그때 그때 그 원리를 적용하는 방법이나 사용하는 도구, 이해방식은 모두 다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이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은 좋고, 무엇인 나쁘다는 식의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인간이 모두 다르듯이, 세상의 모든 변화와 성장의 방법 또한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러한 방법들 역시 수평적, 수직적 구조 중에서 어느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을테니 말이다. 그래서 더욱더 알아야만 하는 것은 변화와 성장의 원리인 것이다.
"사다리의 가장 높은 가로장에서 내려다볼 때야만 비로서 사다리 전체의 재료인 나무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의 패러독스이다." - 켄 윌버 Ken Wilber
인간은 모두 다르다. 그런데 무엇이?
사람들은 모두 다르다. 지당한 말이다. 생긴 것부터가 모두 다르고, 성격도 제각각이다. 생각도 모두 다르고, 타고난 재능도 모두 다르다. 아무리 똑같이 생긴 일란성 쌍둥이라 하더라도, 결코 그 둘이 같다고는 말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서로 간에 더 깊은 이해와 화합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고 말할 때, 이 '다르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의 진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사람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하는 것은 왜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하고, 왜 다르게 행동하는지, 더 나아가 왜 저마다 다른 인생을 만들어 갈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안겨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인간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크나큰 도움을 준다.
먼저 자동차 이야기를 해보자. 사실 자동차가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자동차는 그 종류가 많다. 하지만, 몇 가지의 카테고리로 이들을 모두 분류할 수 있다. 자동차뿐 아니라 인간은 세상의 모든 것을 나누고 분류한다. 자동차를 분류하면, 경차, 소형차, 중형차, 대형차, 스포츠카, SUV/RV, 승합차, 트럭으로 가능하다. (편의를 위해 기타 대형차량, 특수차량 등은 제외한다) 자동차를 이렇게 나누고 나면 세상의 어느 자동차라도 이 중 하나의 카테고리에 집어 넣을 수 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카테고리에 위치하고 있는 차들은 서로 '다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 한 발짝 더 나아가 생각을 해보자. 같은 카테고리에 들어가 있는 차들은 모두 같은 차라고 할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비록 그들이 하나의 카테고리에 위치하고 있을지라도 그들은 엄연히 다른 차이다. 쏘나타와 SM5, 아우디 A6, 모두 같은 중형차이지만, 그것들은 다르다. 하지만, 위의 분류 방법으로는 같은 카테고리에 위치한 그들의 다름을 명확히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카테고리 내에 또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동차로 치자면, 그것은 브랜드나 모델명, 혹은 가격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하나의 카테고리와 그들 내에서 서로 다름을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기준이 있을 때, 비로소 이들이 다르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제는 우리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할 차례이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모두 다르다. 우리가 인간의 다름을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개념은 기질일 것이다. 인간의 기질을 몇 가지로 나누고, 모든 사람을 그것 중의 하나에 위치시킨다. 간단하면서 이해하기 쉬운 DISC를 예로 들어보자. 이는 기질을 D(주도형), I(사교형), S(안정형), C(신중형), 4가지로 나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이 4가지의 카테고리 중 하나에 속하게 된다. 나의 글을 보고 이미 눈치챈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대단히 강한 C형의 기질을 지녔다. 그래서 난 D형 또는 I형의 기질을 가진 사람과 있을 때, 너무나 뚜렷한 대비를 보인다. 즉 그들과 나는 매우 많이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C형의 기질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있다면 어떨까? 다른 기질보다는 그 차이가 덜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과 나 또한 다른 것은 분명하다. 같은 기질을 갖었을지언정, 결코 같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자동차는 각기 다른 가격대 혹은 브랜드를 갖고 있어, 그들의 다름을 표현하기 위해 그것들을 기준으로 삼으면 됐었다. 그렇다면, 같은 기질에 속한 사람들의 다름은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일까? 우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무언가를 찾기 이전에, 같은 기질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일어나는 그 다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나는 이 두 가지의 다름을 두 개의 구조로 설명하고자 한다. 하나는 수평적인 구조이며, 다른 하나는 수직적인 구조이다. 앞서 설명한 자동차의 첫 번째 분류, 그리고 인간의 기질은 수평적 구조로 표현할 수 있다. 이는 피자를 생각하면 된다. 피자 한판은 8조각 또는 12조각으로 잘라진다. 그리고 그 조각들이 모두 모이면 피자 한판이 된다. DISC를 예로 든다면,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라는 피자는 4조각으로 나뉘는 것이다. 그리고 그 4조각을 다시 모두 모으면 피자 한 판이 된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우리는 인간의 다름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수평적 구조와 더불어 수직적 구조가 필요하다. 아래 그림을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수평적 구조에 수직적 구조를 더했을 때, 우리는 한층 더 정교하게 인간의 다름을 표현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자동차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나와 같은 C형의 사람들이라도, 그들은 각기 다른 수직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것이 곧 같은 기질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다름을 표현하게 된다.
높이가 다른 곳에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수직적 구조의 의미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자. '수직적' 이라는 말 자체에 주의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수직적이라는 말은 높낮이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같은 기질을 가진 사람들끼리도 모두 다른 수직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면, 그들은 곧 수평적 위치는 같지만 서로 다른 높이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또 높이가 다른 곳에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는 그저 직관적으로 생각해봐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높은 곳과 낮은 곳에 사는 사람의 차이는 아파트의 높은 층과 낮은 층에 사는 사람의 차이와 다르지 않다. 높은 곳에 사는 사람은 더 멀리 더 넓게 볼 수 있다. 그에 비해 낮은 곳에 사는 사람은 볼 수 있는 범위가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이 둘의 차이이다. 이것이 바로 20층에 사는 사람과 1층에 사는 사람의 차이이다. 우리가 삶 속에서 더 멀리, 더 넓게 볼 수 있다는 것은 더 많은 가능성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높은 곳에서는 낮은 곳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고,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것을 경험할 수 있으며, 결코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산 정상에서 자신이 사는 곳을 내려다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보다 잘 알 것이다. 더 높은 곳에서 더 많은 가능성을 보며 산다는 것, 그것은 언뜻 생각하기에도 우리의 삶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원하는 삶을 만들어 간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이 세상 속에서 더 큰 가능성을 인식하고 그것들을 누리고, 내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직업, 비지니스, 결혼, 행복 등 모든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차원이 다르다.
수직적 구조 대신에 다른 표현을 사용해보자. 바로 '차원'이라는 말을 쓰려 한다. 우리는 흔히 '차원이 다르다'라는 말을 한다. 요즘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애플의 아이폰. 아이폰은 기존의 폰들과 차원이 다른 폰이다. 디자인과 기능은 물론이며, 앱스토어라는 새로운 플랫폼을 성공적으로 구축함으로서 휴대폰 시장을 뒤흔들며,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고 있다. 아이폰은 기존의 이동통신사 중심의 모바일 시장을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중심의 시장으로 재편하였다. 이처럼 우리는 기존의 것들과 말 그대로 게임이 안되는 무언가를 표현할 때 차원이 다르다는 말을 사용한다. 앞서 논의한 수직적 구조를 차원이라는 말로 대신한다면, 다른 수직적 위치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곧 다른 차원에서 살아가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른 차원에서 산다고 하면 앞서 말한 수직적 구조의 의미가 더욱 명확해 질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볼 수 있는 세상의 넓이와 깊이가 다를 뿐 아니라, 이를 넘어 서로 다른 차원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모두 지구라는 같은 물리적 공간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인간 개개인이 인식하는 세상은 모두 다르다. 어떤 이는 세상이 더럽고 추한 곳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세상이 그럭저럭 살만한 곳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세상이 아름다움으로 넘치는 천국과 같은 곳이라고 말한다. 같은 공간에 살고 있지만, 그들은 모두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하다. 이 차원이라는 개념이 이러한 그들의 차이, 다름을 설명할 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
물(H2O)은 온도에 따라 세 가지 모습을 지닌다. 섭씨 0도 이하에서는 얼음, 고체로 존재한다. 그 이상에서는 물, 액체로 존재하며, 100도가 넘어가면 수증기로 변하여 기체로 존재한다. 앞서 말한 차원의 개념을 적용한다면, H2O는 세 개의 차원 중에 하나에 존재하는 것이다. 얼음의 차원, 물의 차원, 수증기의 차원이다. 얼음의 차원 만을 경험한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H2O라는 것은 얼음, 즉 고체일 뿐이다. 그는 그것을 고체로 밖에 이용할 수 없다. 즉, 얼음으로 할 수 있는 것들만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물의 차원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H2O는 액체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리고 그 온도가 어느 이하로 내려가면 얼음으로 변한다는 것도 안다(차원이 수직적 구조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아래 차원에서 위의 차원은 인식할 수 없지만, 그 역은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물과 얼음을 이용할 수 있다. 즉, 한 차원 높은 곳에 위치함으로써 더 많은 가능성을 보고, 삶 속에서 이를 활용할 수 있다. 그는 얼음을 이용하여 다른 것을 차게 할 수 있으며, 물을 마실 수 있다. 끝으로 수증기의 차원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H2O의 온전한 특성을 다 이용할 수 있다. 그는 증기의 개념을 알고,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얼음의 차원을 사는 사람과 삶이 전적으로 다를 수 있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Follow your bliss!!!”, 가능한 말인가?
우리는 모두 똑같은 인간이지만, 서로 다르다. 때로는 정말 딴 세상에 사는 것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의 생각도 말도 행동도 다르다. 그런 차이를 단지 기질로만 설명하기는 힘들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 중에 조셉캠벨이라는 사람이 있다. 평생을 신화연구에 바친 사람이다. 그 사람이 자주 하는 말 중에 하나가 다름 아닌 "Follow your bliss 내면의 기쁨을 따르라"이다. 그는 이렇게 내면의 기쁨을 따라 살면 보이지 않는 문이 열리고 그 문이 나를 잡아끈다고 말한다. 그것이 그리고 자연스러운 삶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같은 범인들에게는 이건 다른 세상의 이야기이다.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왜 그는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어떻게 그렇게 자신있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그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그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가 살고 있는 차원에서는 그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는 그렇게 살면 된다는 것을 실제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더 멀리, 더 넓게 보고 그 공간에서는 그렇게 살아도 된다는 것을 보기 때문에 그런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비록 더 좁고, 더 가까운 곳만을 보는 우리네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아, 딴 세상 이야기처럼 들릴지라도 말이다.
이렇듯 인간은 모두 다르다. 이러한 다름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위치한 수평적, 수직적 구조로 인해 생겨난다. 특히나 수직적 구조에 대한 이해는 여러모로 중요하다. 이는 수평적 구조보다 수직적 구조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라기 보다는, 그동안 사람들이 수직적 구조라는 측면을 바라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자신과 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원을 높이는 것,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각자 많은 숙고가 필요하다. 더 멀리, 더 넓게 세상을 바라보며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인간은 저마다 변화를 꿈꾸고, 성장을 꿈꾼다. 우리가 꿈꾸는 변화와 성장은 대부분 이러한 수직적 구조에서의 상승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에 대한 이해없이 변화와 성장을 시도한다. 이는 성공확률을 떨어뜨릴 수 밖에 없다. 때로는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혹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도 헷갈릴 때가 많다. 이는 지도 없이 떠나는 여행과 다를바 없다. 지도 없이 떠나는 여행은 그 자체로도 짜릿한 경험이 될지 모르겠지만,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지도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이들을 돕는 직업을 가진 코치들에게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진정한 자신을 찾는 험난한 여정을 떠난 자, 그리고 그러한 이들을 돕겠다고 나선 수많은 전문가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제대로된 믿을 만한 지도이다.
통합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켄 윌버의 '통합비전'을 접한 이후로, 나의 삶과 코칭에 있어 '통합'이란 키워드는 항상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통합퀀텀코칭을 연구하는 통합코칭연구소의 모든 연구방향을 결정짓는 기반이기도 하다. 이번 주 모임에서 역시 통합적인 삶이란 무엇인지, 우리가 연구하는 통합코칭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깊고도, 깨끗한 대화가 오가는 시간이었다.
우선 인간의 삶에서 '통합'이란 키워드가 차지하는 비중 또는 그 의미를 알아야 할 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단지 코칭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서 통합이란 표현이 매우 자주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인간을 비롯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부분으로 쪼개어 이해하고자 했던 환원주의의 한계를 보고, 부분의 합이 아닌 전체를 통해 전체를 이해하자는 홀리즘에 기반한 사고방식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기반으로 이해야 할 것 중의 첫째는 뭐니뭐니 해도 인간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인간 삶이다. 우리의 삶의 여러개의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나눔은 그저 상징적인 것일 뿐, 인간의 삶 자체를 그렇게 나누어서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인간과 인간의 삶은 통합적으로 다루어져야 함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통합적이 삶이란 무엇일까? 코칭에서 흔히 사용하는 도구 중에 라이프 휠이란 것이 있다. 인간의 삶의 영역을 나누어 각 영역별로 점수를 매겨 보고, 현재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한 도구이다. 이 도구의 주된 사용 목적은 바로 삶의 균형을 점검함에 있다. 다른 이름으로는 '라이프 밸런스 휠'이라고도 부르니 말이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몸이 건강하지 못하면 행복할 수 없는 것처럼 삶의 모든 영역이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 우리는 이러한 삶을 통합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코칭의 목적은 고객이 완전한 자기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렇다면, 통합적인 삶이란 것 역시 이러한 삶을 뒷받침해야할 것이다. 삶의 각 영역이 균형을 이룸은 물론이고, 이것들의 서로 소통하며 하나의 커다란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삶. 그러한 모습이 아닐까? 통합이라고 해서 수 많은 것들이 하나로 뭉쳐져 있기 보다는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한 것들이 모조리 떨어져나가고 심플한 아름다움을 지닌 삶이 아닐까? 그리고 그 통합의 에너지는 완전한 자신으로 나아감에 연료가 되는 그러한 삶이 아닐까?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변화에 대해 말합니다. 변화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 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작은 변화도 이루지 못해 힘들어하며 좌절하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수많은 자기계발 서적에서, 그리고 전문가들이 변화의 방법들을 알려주고 있지만 어느 것 하나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 역시도 코치의 길을 걷기로 결정을 한 후, '과연 인간의 근본적인 변화란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코칭은 3가지의 기본 철학를 기반으로 탄생되었습니다. 코칭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은 이 3가지 기본전제를 바탕으로 합니다. 그 중 첫번째는 바로 인간은 누구나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코치가 되기로 마음을 먹고, 꽤 긴 시간의 코치훈련과정을 거친 이후에도 이 전제에 대해 다른 이들에게 자신있게 말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렇다는 믿음만 갖고 있을 뿐 그 가능성과 잠재력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뚜렷하게 잡히질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생각지도 않았던 단어 하나가 그것을 아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코치가 되어 걷는 길에서 시작부터 만나게 된 커다란 벽을 하나 허무는 느낌이었습니다. 고맙게도 그 큰 벽을 허물어 준 단어는 바로 "에너지"였습니다. 에너지. 꽤 오랜 시간동안 과학과는 담을 쌓고 살았던 저에게 이 단어는 분명 낯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 하나로 인간의 변화에 대해 품었던 꽤 많은 궁금증들을 풀어 낼 수 있었습니다.
과학에는 무슨무슨 법칙이라 불리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법칙이라고 할 수 있는 한 가지가 바로 '에너지 보존 법칙'입니다. 에너지 보존 법칙은 바로 열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제기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열이 에너지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과학자들조차도 열을 에너지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열을 그저 하나의 화학작용으로 생각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마이머, 헬름홀츠, 줄과 같은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열이 에너지의 한 형태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열을 포함해 에너지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고 그것들은 다른 종류로 변환될 수 있지만, 모든 에너지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에너지 보존 법칙의 내용입니다. 이후 1905년 아인슈타인은 E=mc^2이라는 유명한 공식을 발표합니다. 질량은 에너지로, 에너지는 질량으로 상호 변환될 수 있다는 것을 밝혀낸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 '에너지 보존 법칙'은 '에너지 질량 보존 법칙'이라고도 불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위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변화'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변화의 근본은 결국 에너지의 변환으로 설명됩니다. 그렇다면, 이는 우리가 말하는 인간의 변화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입니다. 인간은 결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거나 그것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에너지의 변환이라는 관점에서 본 변화와 인간의 변화 역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코칭의 첫번째 철학에서 언급한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이란 것이 과연 무엇인지도 이를 바탕으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전제는 단지 코칭 뿐만 아니라 자기계발을 업으로 삼고 있는 모든 이들이 갖고 있는 기본 전제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잠재력, 가능성, 또한 변화의 본질을 가장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 바로 "에너지"입니다.
현재 국내에서 코칭이라고 하면 대부분 대화모델을 기반으로 한 방식의 코칭을 말합니다. 질문과 경청을 기반으로 한 대화위주의 코칭에서도 코치와 고객 간에는 에너지 교류가 이루어지며, 에너지의 개념을 몸으로 알고 있는 코치라면 반드시 이를 염두해 둘 것입니다. 하지만, 고객의 잠재력 개발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분명 많은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일부 코치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에너지 차원에서 접근하는 에너지 기반의 코칭은 물론이고, 이를 넘어 의식기반의 코칭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돕는 방법을 찾던 중, 에너지와 의식 기반의 코칭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SK(Specialized Kinesiology)는 기존의 아날로그 방식의 접근을 보완하여, 인간을 디지털 정보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서 이러한 시도에 날개를 달아주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더 낫다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변화는 여러 차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으며, 그 차원에 맞는 방법들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단지 코치 뿐만 아니라, 자기계발을 하는 대중들 역시 자신의 변화에 대해 이런 폭넓은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각 중에서도 변화의 근본을 에너지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필수적이라 생각합니다. 수많은 변화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매번 실패를 반복하는 이유, 성공한 사람들조차도 몰랐던 그들의 성공의 비밀 등 많은 의문을 풀어줄 실마리들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변화를 원하고, 성장을 원한다. 시간을 더 알차게 활용하기 위해 시간관리를 하고, 지적인 성장을 위해 독서를 하고, 건강하고 멋진 몸을 만들기 위해 운동을 한다. 하지만, 마음만 앞설 뿐 몸이 따라주지 않을 때가 많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다시 좌절감에 빠지고, 자기를 비난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또, 변화는 의지가 강한 사람, 독한 사람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자신은 결코 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해버린다.
그렇다면 자세히 한 번 들여다보자. 당신은 변화하길 원한다. 하지만, 그 변화를 가로막는 것들은 외부에 있기 보다는 내부에 있는 경우가 많다. 마음 같아선 더 열심히 살고 싶지만,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여기서 ‘자기도 모르게’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는 곧 ‘무의식적으로’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이 말이 바로 변화의 결정적인 힌트이다.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무의식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우리가 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 많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우리가 의식적으로 하지 못하는 것이 훨씬 많다. 팔을 한 번 접었다 펴는 데에는 수많은 근육의 움직임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근육들을 모두 의식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우리의 무의식속에서 처리해주는 것이다. 변화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변화하고자 노력하지만, 그러한 노력은 무의식적으로 좌절되고 만다.
의식적인 뇌
무의식적인 뇌
뇌의 용량
17%
83%
임펄스 속도
120~140mph
10만mph 이상
초당 비트 수
2000억
4000억
인식 및 행동 통제
2~4%
96~98%
기능
의지에 의한 작동
비자주적인 행동
시간
과거와 미래
현재
기억의 범위
20초 까지
영원히
위의 표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가 인식하고 우리의 행동을 통제하는 것은 겨우 2~4%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변화하고자 할 때 집중해야 할 부분은 바로 우리의 무의식이 아닐까? 기존의 자기계발에서는 하나같이 변화를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과 의지, 끈기, 인내 등을 강조해 왔다. 그리고 동기부여를 통해 그러한 것들을 지속적으로 생산해내고자 애썼다. 하지만, 그러한 방법으로 변화를 이룬 사람들은 얼마나 되는가? 그러한 방법으로 원하는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진정한 변화를 이루고자 한다면 행동의 96~98%를 통제하는 무의식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닌가? 변화하려는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원점으로 돌아가는 자신을 비난하는 대신에 이제는 그동안 신경쓰지 않았던 무의식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