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코치의 에고와 직관'에 관해 쓴 한 코치님의 컬럼을 보게 되었다. 글에서 다루는 내용은 코치들이 코칭현장에서 발견되는 자신의 에고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코치들에게 근본적이면서도 실질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주제였다. 흥미가 생겨 글을 차근차근 읽어봤지만, 글에서 제시하는 내용은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대부분 초보코치들이나 코칭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될 내용이건만, 그것이 코칭을 제대로 소개하기는 커녕 오히려 왜곡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인터넷에 공개된 글인 만큼, 관련 글을 쓰는 것이 해당 컬럼의 필자에 대한 공격으로 여겨질 수 있어 쓸까 말까 잠시 고민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글이 포스팅된 곳이 현재로서는 한국코칭계의 중심이라고 여겨지는 한국코치협회 홈페이지이다. 컬럼의 필자 역시 코칭계에서 꽤 영향력을 갖고 계신 분으로 알고 있다. 즉, 그 글 또한 비슷한 영향력을 갖고 대중에게 보여질 것이라는 말이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엔 코칭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오해할 여지가 상당히 크다는 것이다. 그런 영향력이 있는 만큼 오히려 어느 정도는 비판에 열려있어야 한다고 느껴 글을 쓰게 되었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코칭에 대해 제대로 알리고 싶다는 것 외에 그 어떠한 의도도 없음을 미리 밝힌다. (코칭을 제대로 알리는 것은 코치들이 먹고 사는 문제가 달린 일이다.)

앞서 말했듯이 글의 주제는 코치들이 코칭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자신의 에고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이다. 그리고, 필자(이 글에서 필자는 내가 아니라, 원래 컬럼의 필자를 말함)는 그것을 직관과 연관지어 설명한다.

"직관과 에고는 동전의 앞 뒷면과도 같다. 고객의 이야기를 들으면 코치의 내면에 반응이 일어난다. 그것이 직관으로 표현될 수도 있고 에고로 표현될 수도 있다. 이렇게 출발이 같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는 코치의 최고의 미덕으로, 또 다른 하나는 코치를 괴롭히는 부덕으로 치부되게끔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표현의 차이이다. 코치 내면에 일어나는 반응을 순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면 에고를 보였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그러한 반응을 중립적 단어로 중립적 접근법을 사용해서 고객에게 전달하면 직관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직관과 에고는 모두 코치의 내면의 반응이며,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내면의 반응을 에고의 형태나 직관의 형태로 잘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코칭에 관심을 갖고 있거나 초보코치들이 이 글을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게 만드는 대목이다.

첫 번째 이유로 이 글에서는 직관과 에고를 전혀 분별하지 못하고 있다. 직관과 에고를 단지 코치의 내면의 반응으로 싸잡아 마치 같은 것처럼 말한다. 그렇다면 굳이 다른 단어를 쓸 필요가 없다. 그냥 내면의 반응이라고 하면 될 것이다. 직관과 에고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직관은 에고를 넘어서는 것이다. 에고를 초월한 상태에서 오는 것이다. 컬럼에서는 정확히 직관을 어떤 의미로 쓰고 있는지 그 정의를 밝히고 있진 않다. 하지만, 코치에게 있어서 가장 큰 미덕 중 하나가 직관력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직관'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즉, 통찰이나 영감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세계적인 자기계발 강사이자 작가인 웨인 다이어 역시 "영감이란 아주 먼 곳에서 오며, 그곳에서는 에고 혹은 에고가 품는 환상보다 훨씬 강한 힘에 우리를 내맡긴다."라고 말하고 있다.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라고 해서 모두 같은 것이라면, 직관을 주로 사용해 일하는 모든 이는 에고를 사용해 일한다고도 해야 할 것이다. 작가가, 음악가가, 화가가 에고로 작품을 만든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코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굳이 에고와 직관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코칭을 설명하자면 코칭은 '에고를 넘어서 직관으로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고객이 자신의 진짜 내면의 소리(직관)을 듣고, 그에 따라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코칭이다. 그런데 이 둘을 어떻게 같은 것이라 할 수가 있는가?

"직관과 에고는 코치 내면의 소리라는 점에서 같은 부모 밑의 형제와도 같다. 에고가 일어난다고 해서 자신을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다. 코치도 인간이기에 상대의 소리에 대한 반응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에고를 없애기 위해 노력한다면 코치의 에너지를 오히려 버려야 하는 것에 쏟게 되고 그만큼 점점 더 자라날 수 밖에 없다. 에고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중립적 표현으로 순화시키는 작업에 에너지를 쏟아보자. 그러면 직관이 뛰어난 코치가 될 수 있다. "

두 번째 이유로는 그에 대한 코치의 대처방법이다. 직관과 에고를 분별할 수 없으니, 대처방법 또한 적절치 못한 것은 당연하다. 컬럼에서는 에고라도 중립적 표현을 쓰면 직관이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훈련을 반복함으로서 직관력을 키울 수 있다고.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되냐"는 말이 있다. 어떠한 단어나 수식어를 써서 에고를 드러내도 그것은 에고일 뿐이다. 에고가 중립적 표현을 쓴다고 해서 직관으로 변하지 않는다. 코치의 내면에서 올라온 것이 에고인지 직관인지는 그것이 코치의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이미 결정된 것이다. 게다가 에고를 중립적 표현으로 순화시키는 작업을 하면 직관이 뛰어난 코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진짜라면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이 컬럼은 지금 한국 코칭계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를 너무나 명확히 드러내 보여준다. 그저 보이는 것, 코치가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이 코칭의 전부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대부분의 코칭훈련은 이러한 얼토당토 않은 전제하에 진행되고 있다. 코칭훈련이라고 하지 말고, 차라리 질문훈련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적절하다. 단순히 질문만 달달외워, 온화한 표정을 하고, 고객에게 그것을 던져주는 것이 코칭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에고는 어떤 표현을 쓰더라도 에고일 뿐, 직관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중립적이지 않은 표현을 쓴다고 해서 직관이 직관이 아닌 것이 되지 않는다. 표현 자체는 상대방이 듣기에 안 좋은 말이라도 에고를 넘어선 것이라면, 그것은 상대방에게 그 진의를 전달할 수 있다. 누군가 나에게 쓴소리를 하더라도 그것이 고맙게 여기지는 경우가 그런 경우이다. 누군가 내 인생에 큰 보탬이 될 법한 얘기를 해도 그것이 고깝게 들리기만 하는 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 반대의 경우이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은 에고로 쓴 글인지, 직관으로 쓴 글인지 자못 궁금해진다.

* 인용된 글의 원문 :
 http://kcoach.or.kr/view.asp?subPage=610&b_code=14&cate_f=&page=5&field=&str=&sid=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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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최코치

인디언 신화 - 뉴욕 공립 도서관 (당시 나이 10세, 11세부터 성인 도서 서가 출입)
생물학 - 캔터베리 예비학교
생물학, 수학 - 다트머스 칼리지
영문학, 비교문학 - 콜롬비아 대학
힌두교, 불교, 동양철학에 관심 -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를 만난 후
중세문학 (아더왕 전설 연구) - 콜롬비아 대학원
로망스어, 중세프랑스어, 프로방스어, 라틴어, 문헌학 - 소르본 대학
현대미술(피카소, 브라크)에 관심 - 소르본 대학
현대문학(예이츠, 엘리엇, 제임스 조이스)에 관심 - 소르본 대학
산스크리트어, 인도-유럽어족의 언어 - 뮌헨대학
괴테, 토마스만, 프로이트, 융의 작품을 접함 - 뮌헨대학
러시아어 - '전쟁과 평화'를 원문으로 읽기 위해
슈펭글러, 토마스만, 융, 조이스, 프레이저 - 캔터베리스쿨 교사
역사, 영어, 불어, 독어를 가르침 - 캔터베리스쿨 교사
문학, 독일철학, 비교신화학 - 사라 로렌스 대학 교수
하인리리 침머 - 볼링겐시리즈 편집자

위의 목록은 한 사람의 평생토록 공부했던 학문들을 리스트로 정리한 것입니다. 맨 윗줄을 보면 10세 때부터 공립 도서관을 다니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1살이 되어서는 성인 도서 서가 출입을 하게 됩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어린이 서가에 있는 책을 모두 섭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더 볼 책이 없어진 것이었죠. 그래서 특별히 도서관의 허락을 받아 어린 나이에 성인 서가를 드나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힌두교, 불교, 동양철학 등 종교와 철학을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또 한가지 놀라운 것인 언어입니다. 그는 로망스어, 중세프랑스어, 프로방스어, 라틴어, 신스크리트어 등을 공부했습니다. '전쟁과 평화'를 원문으로 읽기 위해 러시어어를 공부했습니다. ^^;; 그리고 또 영어, 불어, 독어를 가르치기도 했군요. 거참,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정확히 이 사람의 지능지수는 모르겠지만, 어려서부터 신동소리를 듣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꾸준히 즐겁게 공부한 학자였을 뿐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는 시간을 빼고, 하루를 4시간씩 4개의 덩어리로 나누었습니다. 총 16시간을 사용한 것이죠. 그 중 하나는 휴식에 썼습니다. 나머지 세 개는 책을 읽는 데 썼습니다. 이 사람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한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많은 언어와 학문을 익힐 수 있었을까에 대한 의문이 조금은 풀립니다. 이 사람은 다름 아닌 세계 최고의 비교신화학자로 불렸던 조셉 캠벨(Joseph Campbell)입니다. 제 블로그에도 몇 번 이 분과 이 분의 작품에 대해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이 리스트를 보고 있자니, 요즘 제가 공부하는 것들이 생각났습니다. 코치가 되어 "인간의 근본적인 변화와 성장은 어떻게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많은 학문과 기술을 접하고 있습니다. 정말 평생토록 결코 들쳐 볼 것 같지 않았던 책들도 꽤나 많이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그것이 즐겁다는 것입니다. 학생때도 지금처럼 공부했다면, 지금쯤 뭐가 되었을지 궁금해집니다. ㅎㅎ 하지만, 조셉캠벨에는 아직 비할 바 아닙니다. 저도 평생을 한다면 저 정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죠셉캠벨은 대부분을 책을 통해 공부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참 외롭고 힘든 길을 걷는 것처럼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는 행복했습니다. 대공황 때는 그도 직업이 없어, 밤마다 밴드생활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행복했습니다. 그가 평생을 한 길만 보여 우직하게 걸어갈 수 있는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항상 외쳤습니다. "Follow your bliss !!!". 내면의 기쁨을 따르라고요. 이제는 저도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압니다. 제가 가는 길은 그렇게 매력적입니다. 그가 흔들림없이 갈 수 있었던 그 힘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싶다 말하면서도, 자꾸만 그렇지 않은 쪽으로만 가는 듯 합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저 남들이 가는 대로 따라 갑니다. 남들이 옳다하면 그것이 옳다 여깁니다.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답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죠셉 캠벨의 <신화의 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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